만해 한용운 연보
-1879 8월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905 1월 백담사에서 승려 입문
-1907 블라디보스톡 일본 등지를 여행 세계사의 변화를 파악함
-1910 한일 불교 동맹 체결 분쇄 만주 망명 후 독립운동 지원
-1911 조선 임제종창설 관장서리 취임
-1913 불교서관 에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
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
불교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요구에 뒤늦은 대응과 방관자적 태도는 근대 한국불교를 일제의 침략 이용물로 만들었으며 점차 한국불교계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몇몇 선구자들이 등장하였다.
만해 한용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고 그가 저술한 논문 <조선불교유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우하였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승려들을 포섭 또는 개종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맞서 조선의 불교에서는 1925년, 조선불교 선교양종을 하나로 합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으로 구성하였다. 일본의 각 종파의 승려들이 한국불교를 잠식해 나가는 것을 막아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선교양종이라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 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
조선은 그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1910년 일본의 조선 늑탈로 국권을 잃었고, 한민족사는 단절되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국권을 상설하기 전, 나라가 품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교육입국의 정신을 내세우고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첫 번째는 민족지도자의 교육운동이
다양한 체험 후 다시 백담사에 머뭄
- 그의 입산은 종교적 귀의라기보다는 의병에 참가한 전력을 숨기기 위한 일종의 도피
- 방황하는 그를 백담사 주지 연곡스님이 불문에 귀의시킴
- 1905년 연곡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계명은 봉완, 법명이 용운, 법호는 만해로 불교를
수도하는 승려가 됨